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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글38

2022.01.21 <소설 프로젝트 2: 하양> 백예린 - antifreeze(원곡: 검정치마) [PM 4:10] 얼마만의 재회가 이렇게 될 줄이야. 머리를 질끈 묶고 안전벨트를 맨다. 입에선 펄펄 끓는 주전자처럼 김이 나온다. 픽업트럭을 몰아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른다. 의자는 또 왜 이리 높은지 액셀에 다리가 닿지 않는다. 작달막한 나의 높이를 찾는데 한숨이 나온다. 키는 멀대같이 큰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왜 트럭을 뽑았대. 조수석에 축 늘어진 강민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이마에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닦아 주려는데 완전히 얼어 피부에 들러붙어있다. 열일곱. 그를 처음 만난 10년 전. 시골의 작은 중학교를 졸업했던 나에게는 도심 고등학교의 생활이 너무 낯설었다. 시골에선 입지 않던 교복, 시끌벅적한 쉬는 시간, 낯선 기숙.. 2022. 7. 17.

2022.01.19 <소설 프로젝트 1: 파랑> Porter Robinson & Madeon - Shelter 좁디좁은 적재소에서 벗어나 나만의 넓은 집을 장만했다. 요 며칠간 인테리어에 열을 올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다. 퇴근하는 길에 마트에서 사 온 화분을 식탁 정중앙에 놓았다. 파란 장미. 꽃말이 나에게 적합한 것 같아 고민 없이 골랐다. 과거엔 재배가 어려운 색이라 '불가능'이었지만, 기술의 발달덕에 '기적'이라는 새 꽃말을 갖게 되었다. 오늘은 감정 이식술을 받은 지 28일째 되는 날이다. 나는 감정 이식술을 받은 97,128번째 기계로 기록되었다. 이젠 제품번호가 아닌 등록번호를 품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 등록번호는 보자마자 외웠지만 괜스레 ID Card를 꺼내어본다. 리버(River). 내 이름이라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다. 갈피를.. 2022. 7. 17.

2022.02.19 <소설 프로젝트 0: 초록> 사랑하는 딸, 리아에게 오늘은 날이 좀 풀렸더구나. 네가 있는 곳은 어떠니.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이라고 말해줬던 것 같은데, 이 아비는 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주변 친구들하고는 싸우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니. 인생 길게 보면 네 곁에 남는 사람은 이 부모가 아니라 친구들이니 잘 대해주려무나.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만난다던 사람은 아직 네 곁에 있는지도 궁금하구나.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너를 통해 듣기로는 이 아비보다 훨씬 늠름한 사람인 것 같았다. 서로 이해하며 먼길 함께 걸어가면 좋겠구나. 마당에 심어 놓았던 자작나무는 벌써 네 키를 훌쩍 넘어섰단다. 리아 네가 '왜 이 나무는 줄기가 하얗냐'며 물었던 그 나무란다. 올 겨울을 넘기면 이 아비조차도 내려다볼 것 같다. 혹시 자작나무의.. 2022. 7. 17.

2021.11.30 <하늘도 슬피 울더라니> 해가 뜨지 않는 날이었다. 시계는 정오를 가리킴에도 온 세상이 어둑했다. 비가 말그대로 기분 나쁘게 내렸다.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친 것도 아닌. 그런 하루였다. 오늘 사람이 죽었다. 아랫학번 학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늘도 슬피 울더라니.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지만 하루종일 기분이 멍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평소처럼 톡방에 질문을 올리고, 평소처럼 공부를 하고. 사실 나도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것 같다. 유달리 오늘은 억지로라도 슬픔에 잠기고 싶었다. 내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워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나의 삶이 인간다워 지는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유난떠는 것 같을 수 있다. 잘 아는 지인들도 티 안내고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데, 만.. 2022. 2. 4.

2021.06.15 <구름> 본과 2학년 1학기 시험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일 모레에 있을 정신과 시험만 보면 의대 세번째 학기가 끝이 난다. 이제 단 한 학기면 병원으로 실습간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이번 학기는 유독 힘들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 역시 입을 모아 말한다. 공부량이 늘어난 것 뿐만 아니라 성적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가중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정신과 약을 먹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친구도 있고, 온 몸을 휘저어가면서 잠을 떨쳐내려는 친구도 있다. 다들 무엇을 위해 그리 숨가쁘게 뛰어가는지, 무엇에 쫓겨, 무엇을 쫓아 이리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그 어둠에서 비롯된 공포가 많은 이들을 좀먹었다. 그럼 나는 어떠했는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몰두하여 의자.. 2022.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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