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검증구역: 4. 개방성

'개방성' 차원은 사회적 소수자와 새로운 윤리규범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측정한다. 현대사회는 수차례의 산업혁명을 거쳐오면서 지구탄생이래 가장 빠른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던 한반도의 기후는 어느새 옛말이 되어버렸고,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변화하고 있으며, 좋든 실든 우리는 다가오는 그 세상을 맞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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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적으로 변화만 할 수는 없다. 논어 위정편에 나온 구절인 '온고지신'의 뜻처럼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가려서 받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입장 차이를 내보인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일본의 메이지유신,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부터 오늘날의 MZ와 꼰대 갈등까지. 낯선 변화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더 커뮤티니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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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명의 출연진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 사회적 소수를 위한 정책을 지지하고, 기존의 윤리규범을 대체하는 새로운 윤리규범에 거부감이 적은 '개방'측 6명. 소수자보다는 다수의 입장을 중시하고, 새로운 질서보다는 기존의 윤리규범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전통'측 7명. 출연진들은 매일 새로이 제공되는 규칙들에 당황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개방 성향으로 나왔음에도 다수의 입장에 서기도 했으며, 전통 성향으로 나왔음에도 소수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들의 엇갈린 경험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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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으로 대표되는 마이클의 본캐는 랩퍼이다. '쇼미더머니'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부터 '피의 게임'과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도 다수 참가하였다. 숱한 경쟁에서 경험한 바를 토대로 마이클은 수익활동과 미션을 받을 때마다 스파이의 존재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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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불순분자가 생명에 위협을 줄만한 행태를 보이지 않자 구성원들은 불순분자가 없을수도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마이클은 서바이벌 참가자들이 이렇게 태평할 수 있냐며 분개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스파이를 찾는데 몰두했다. 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두려워하는 다른 출연진들과 달리 마이클은 '불편한 진실' 거론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마이클의 생존본능과 적극성은 프로그램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소수 의견은 거론하기조차 두려운 분위기 속에서도 목소리를 냈고, 불평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항상 대안을 내놓았다. 연출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감사한 출연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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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수임에도 의견을 관철하지 않았던 그의 주장은 과연 옳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이클은 틀렸다. 유토피아는 가능했다. 사상검증구역이라는 프로그램은 마이클이 기존에 참가했던 프로그램들과 달랐다. 역사는 미래를 말해준다지만 확증해주지는 않는다. 불순분자와의 공생이 가능했고, 사상자없이 프로그램 완주가 가능한 구조였다. 결론적으로는 유토피아가 없다고 주장한 마이클 스스로가 유토피아를 없앤 꼴이 되었다. 참가자들의 모든 행동에 대해 불순한 정도를 측정하는 모습은 마치 PTSD로 괴로워하는 유가족같은 안타까운 느낌까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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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타당성을 떠나 의견을 피력한 과정에서도 고쳐할 점들이 많이 보였다. 첫째, 마이클은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본인 생명에 대한 위험부담이 커졌다며 도움을 갈구했다. 갈구를 넘어서 강요하기까지 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는데, 그 누구도 색출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음을 인지해야한다. 본인이 선택한 길은 본인이 감내해야 한다. 둘째, 감정이 아니라 논리적인 설득을 했어야 한다. 본인 의견이 묵사발 당하여 기분이 상한 것은 기억못하고, 의심가는 사람이 없어 탈락자선정 투표를 않겠다는 슈퍼맨에게는 '왜 2표밖에 못받았는지 알겠다'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테드의 필승법이 사회주의같다며 논리적인 설득없이 무작정 엠바고를 걸고 입을 닫은 낭자와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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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특정 집단이 아닌 모든 구성원의 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이다. 모든 구성원의 이야기를 일일이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다수결이라는 대체제가 자리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한 표가 주어지지만 그것이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다수가 얼마든지 포식할 준비가 되어있음에도 취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소수라는 숫자 자체가 배려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본인의 논리가 틀리진 않았는지 다수의 의견과 비교해볼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도 소수인 본인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되면, 그 이유를 소수끼리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 논리적으로 설파해야만 배려가 정당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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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고 있으나 미래를 다르게 보던 참가자가 바로 테드이다. 테드의 본캐는 영화의 연출이나 구성을 리뷰하는 유튜버 '천재 이승국' 이었다. 테드는 채널명에 걸맞게 수익활동과 탈락유발 미션을 받을때마다 필승법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실제로 멋드러지게 해낼때면 탐정 내지 경찰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상검증 시도횟수가 제한된다는 점, 그리고 사상검증에 드는 비용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맞교환' 방식을 고안해냈다. 초반에 고의로 사상검증에 실패해서 후반부에 커질지도 모르는 욕심을 미리 제거하자는 좋은 아이디어였다. 국민들이 서로 총구를 겨눌 위험을 고려하여 개인 총기류를 맡아두는 모습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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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는 그 이후로도 수차례 기지를 발휘하였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는 교도소 판옵티콘 형태를 제안하여, 혹시 모를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즉시 범인을 축출해낼 수 있게 만들었다. 거리 곳곳에 CCTV를 설치하여 국민 다수의 밤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후반부엔 리더의 인생스피치 탈락구제권을 활용하여 불순분자로 의심되는 벤자민 탈락에 큰 기여를 하였다. 용의자를 심문하여 검거해내는 장면이 겹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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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는 필승법 공유에 앞서 '이상적인 천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언을 해왔다. 그런데 정말 이상적이었을까. 허점이 있었다. 맞교환 방식은 사상점수가 반강제적으로 공개된다는 제한점이 있었다. 이는 맞교환방식보다 더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셈이다. 당시는 판옵티콘이 제안되기 전이었다. 불순분자가 몰래 코드열람했던 사람을 죽인다면, 그 누명은 죽은 사람의 파트너가 고스란히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맞교환 방식은 개인자금 지출이 필수적인 방식이었다. 당시 테드의 개인자금은 200만원으로 높은 편이었다. 100만원을 보유하던 6명은 맞교환 방식을 통해 0원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0원이 될 약자들이 의견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환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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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는 '전체주의를 지양한다'라는 결심을 하며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다수결이 점령해버린 커뮤니티에는 소수 의견표출의 자유가 없었다. 첫째, 필승법에 반론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하라고 독려했지만, 정작 스파이가 뒤를 칠 수 있는 구조라며 자유롭게 말한 마이클은 불순분자로 의심받았다. 둘째, 기자는 취재한 내용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공지되었지, 그 이유를 말해야한다는 공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테드는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 기자를 불순분자의 조력자로 의심했다. 셋째, 여러 필승법에서는 '면제권을 써준다'라는 전제가 따랐다. 다수가 찬성하고 있는데 소수는 어떻게 생각하나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출연진들은 테드가 주장하는 규범에 갇혀지냈다. 이 규범은 필승법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억제적인 효과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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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인 다수결에도 허점은 존재한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나치였다. 당시 독일엔 현대에도 훌륭한 헌법이라 평가되는 바이마르 헌법이 존재한다. 이에 근거해 뽑힌 총통이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다수결에 힘입어 법률을 제정하여 소수민족인 유대인을 학살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향하는 이상점이던가. 구성원 100명 중 1명의 재산을 몰수하여 99명에게 배분하겠다는 안건은 다수결 사회에서 무조건 인준될 것이다. 다수가 권력을 차지하면 남는 것은 소수에 대한 횡포뿐이다. 소수에게 의견을 말할 자유를 주었다라는 변명을 하기에 앞서서, 정말 그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었는가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하나의 인간은 여러개의 특성으로 구성되어있다. 각각의 특성에서 모두 다수에 속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치 특성에서는 다수에 속하지만 젠더 차원에서는 소수에 속할 수도 있고, 식습관은 다수에 속하지만 연령은 소수에 속할 수도 있다.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소수들이 곳곳에 산재해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모질게 대하는 만큼 본인에게 그 화살은 다른 차원의 소수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만을 위해서 살 수도 없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세상의 모든 목소리를 채집하면 노이즈가 되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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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성 차원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한가지 있다. 13명의 출연진이 개방 6명과 전통 7명으로 균등하게 나뉜 것처럼 보이지만 대한민국 사회를 잘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출연진의 연령대 분포가 대한민국의 연령대 분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의 평균 연령은 44세였다. 하지만 출연진들의 평균 연령은 30대였다. 심지어 최고령자인 그레이와 낭자의 나이가 44세였다. 그 결과 전통에 속한 7명 모두 1점에 그쳤고, 2점 혹은 3점의 극단적인 전통측은 단 한명도 없었다. 젊은 세대들의 접근성이 좋은 플랫폼에서 제작된 만큼 젊은 세대를 섭외했을 터이지만, 전통 2~3점의 원로 출연진을 한두명정도 끼워넣었다면 훨씬 다채롭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