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검증구역: 3. 계급

'계급' 차원은 경제적 출신과 태도를 측정한다. 계급 차원이 다른 차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두가지 있다. 첫째, 성향평가시 비교적 객관적인 질문이 많았다. 한 사안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특정 경험이 있는지 빈도를 물었다. '서민' 출신에 해당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린시절 집에 곰팡이/쥐가 나왔었는지, 식비/학비를 면제받거나 지원금/대출을 받은적이 있는지, 쇼핑에 있어 가성비/할인쿠폰/중고거래가 필수적이었는지 등이다. '부유' 출신에 해당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릴 적 과외/해외여행/유학을 경험했는지, 부모의 학력/취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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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현재의 상황이 아닌 어릴 적의 상황을 측정했다는 것이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개의 인물보다는 이슈를 몰고 팬덤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를 캐스팅하는 것이 프로그램 성공에 도움이 된다. 그렇다보니 출연진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정도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이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계급차원을 나눴다면 대부분의 출연진이 부유 출신에 속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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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인터뷰에서 출연진들은 본인이 자라온 환경에 대한 여러 경험을 이야기했다. 먹고 사는 것 이외는 전부 사치였다고 말하는 출연진부터, 부족함없이 자랐다는 출연진까지. 출연진 13명 중 8명은 부유 출신, 5명은 서민 출신으로 책정되었다. 양측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출연진은 부유출신의 지니, 서민출신의 다크나이트였다. 둘의 점수가 달랐던 원인은 과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태도에도 큰 차이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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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는 야망에 가득 찬 사람이다. 첫날 2천만원의 공금을 개인자금으로 가져갈 때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본인을 1번으로 써서 2천만원을 가져가고 싶었다며 인터뷰에서 털어놓는 모습은 사탕을 눈앞에 둔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지니는 '리더가 된 자신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는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이유로 뒤에서 네번째 순서에 안착했다. 앞의 8명의 배려덕에 지니를 포함한 뒤의 4명은 1천만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불안을 무릅쓰고 뒷번호를 자처했던 11, 12번에게 300만원을 배정하자는 생각이 지니의 머릿속엔 없었을까. 지니는 12번인 슈퍼맨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300만원을 쓴 출연자이지만, 인터뷰에서 '그 때 400을 썼어야했다'며 후회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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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는 그 이후로도 시종일관 상금에 눈이 멀어있었다. 최저 보유자를 위해 리더공금을 배분하겠다는 자리에서도 '0원 보유하고 있다고 쓰겠다'는 말을 했다. 농담이랍시고 던진 가벼운 돌이 커뮤니티를 혼탁하게 하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최저 보유자들을 흐릿하게 함을 생각이나 했을까. 그레이가 하마를 죽였을 때의 지니가 내뱉은 탄식은 궤를 달리했다. 하마의 죽음에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마의 상금을 이어받은 그레이의 코드를 본인은 알고 있었다며, 본인이 그레이를 죽이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했다. 물론 지니의 야망은 그레이의 욕망과 달랐다. 지니의 열정이 과했을지라도 다른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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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지니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마지막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본뜬 신뢰게임이었다. 자신의 상금과 상대의 상금을 합쳐 균등하게 분배할지, 자신이 상대의 상금까지 모조리 독식할지 선택하는 게임이었다. 지니는 월등히 낮은 상대의 상금을 보고 독식을 택했다. 상대인 마이클은 지니가 분명 독식을 눌렀을거라며 독식으로 맞받아쳤다. 그 누구보다 큰 야망을 가슴에 안고 뛰어온 지니는 결국 0원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마찬가지로 상금격차가 컸지만 상대에게 존중받으며 상금을 타간 고애신, 그리고 필요할때만 발톱을 꺼내 상금을 타간 슈가와 대비되는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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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 중요한 서바이벌게임에서 상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니는 자신의 성공에 몰두하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가누가 돈을 많이 버느냐 기록을 갱신하는 기계가 아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돈으로 살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자본주의에서 돈을 좇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를 위해 제물로 바치는 청춘과 낭만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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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가 야망으로 대표되는 출연자라면, 다크나이트는 낭만에 취해있는 출연자이다. 첫 개인자금 분배에서 1번으로 들어가서 최소금액인 100만원을 적고 나오겠다며 공표하기도 하고, 뜻하는 대로 되지않아 의기소침해있는 마이클의 딱한 사정을 대변해주기도 했다. 슈퍼맨을 지지하다가 백곰 당선이 유력해지자 노선을 갈아타던 대부분의 출연진과 달리, 다크나이트는 홀로 남아 슈퍼맨과의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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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나 남을 위한 다크나이트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지니와 마찬가지로 개인상금 0원으로 마무리했다. 다크나이트는 본인의 생존과 상금에 있어 가장 열의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다. 첫날 호감도 투표에서 '누구에게 주든 큰 의미 없다'며 속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의를 두지 않았던만큼 마이클에게 말실수를 해버렸고 이는 결국 커뮤니티 첫 불신의 씨앗이 되었다. 여러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작성하여 좋아요를 받아야하는 개인미션에서도 같은 내용을 복붙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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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장기인 체력과 정신력을 활용할만한 활동이 프로그램에 거의 없었던점을 감안하더라도, 커뮤니티에 이렇다할 기여를 전혀 못했다. 프로그램의 정체성과도 같은 토론미션, 리더출마에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호감도를 내어줄 다양한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고 형과 아우, 흡연자 연맹에만 묶여있었다. 인터뷰에서 '최저임금은 사람을 노력하지 않고 길들여지게 만든다'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프로그램 내에서는 가장 많은 복지혜택을 받았다. 공금 덕분에 굶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굶게 되어도 낭만을 좇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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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심지어는 노력을 해도 뒤쳐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재테크와 같은 불로소득이 근로소득을 훨씬 상회하며, 배우지 않으면 뒤쳐지는 상황이 펼쳐졌다. 빈곤의 가장 큰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말에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성공의 가장 큰 기여도 개인에게 있다는 점을 아로새겨야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불충분하다면 체제의 변화도 꾀해야 한다. 존경하는 대통령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없다. 대통령이 잘하든 못하든 당장 나한테 무엇이 돌아오는가'라고 답하는 것은 계급이라는 족쇄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것 뿐이다. 빈곤에 대한 논의는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의사표현조차 없다면 강자들은 본인에게 유리한 길을 개척하는게 인간으로서 당연한 선택이다.

계급은 공동체 사회에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무기와 식량의 저장이 가능해진 먼 옛날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어 현대의 흙수저, 금수저 논쟁까지 단 한순간도 제외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쌓여온 경험이라는 토대 위에 차곡차곡 쌓여온 선입견도 그만큼 많다. '흙수저는 게으르다', '금수저는 고생을 안해봤을 것이다'. 서로를 향한 감정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열심히 일궈낸 부유함으로 베이징덕을 먹겠다는데, 옆 테이블의 자장면을 먹는 사람을 보고 죄책감이 드는게 과연 정상인가. 두번다시 오지않을 청춘을 글로 남기는데, 일찍이 취업한 친구의 SNS를 보고 열등감이 드는게 과연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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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은 살아온 환경과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다를 뿐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부유층이라고 승리한 삶, 서민층이라고 패배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이며, 그 비중은 어느정도인지 스스로 알고 조정할 줄 아는 삶이 진정한 인간의 삶 아닐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달려야 결국 보이는 것들을 모두 볼 줄 아는 시야가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