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검증구역: 2. 젠더

'젠더' 차원은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를 측정한다. 누군가와 처음 대면하는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상대방의 여러 정보를 받아들인다. 첫눈에 그 사람의 정치성향이나 계급, 개방성을 추론하기는 어렵지만, 젠더는 비교적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본 프로그램에서도 가장 먼저 세력이 형성된 근간은 성별​이었다. 성별은 나이보다도 추론이 쉬운 정보이면서, 변질될 수 없는 탄탄한 유대관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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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명의 출연진 중 7명은 페미니즘, 6명은 이퀄리즘으로 상당히 균형있게 나뉘었다. 그렇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페미니즘을 찬성하진 않았고, 남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페미니즘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남성임에도 페미니즘에 속한 2명, 여성임에도 이퀄리즘에 속한 2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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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도 본 프로그램에서 성별은 정보가 극히 제한된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영향력 없는 사상이었다. 성별만을 가지고 남녀가 갈라서고 서로를 혐오하는 일이 없었다. 첫번째 이유는 성별로 인한 격차가 발생할 만한 수익활동이 없어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던 점. 두번째 이유는 본 글의 주제이기도 한 '불순분자'라는 공공의 적이 있어 서로가 총구를 겨눌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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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분자. 사전에서는 '사상이나 생각이 그 조직의 것과 달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라고 말한다. 불순분자는 프로그램 내내 출연진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출연진들은 불순분자의 정체는 물론이고, 역할, 존재이유 등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공포는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출연진들은 불순분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혐오했다. '사상검증을 통해 출연진들을 제거하려들 것이고, 그로 인해 개인상금을 취할 것이다'라는 추측만 존재했다. 그간의 서바이벌 경험과 이미지를 들고와서 갓태어난 벤자민에게 추궁했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의 무게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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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불순분자는 출연진들에게 해를 가할 수 없는 규칙이었다. 다른 출연진과 달리 불순분자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이라고는 사상코드와 개인자금을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언제든 악용될 수 있는 무기일 수 있지만, 유용하게 사용될 여지도 있었다. 개인상금이 적은 사람이 모든이에게 구걸하러 다녀야하는 비참한 상황을 없애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불순분자 역할의 벤자민은 출연진들을 해치지 않았다. 퀴즈를 푸는데 큰 공헌을 하여 공동자금 마련에 이바지 하기도 했다. 불순분자라는 명칭이 아니라 복지부장관이라는 이름이었어도 이토록 혐오했을까. '여교사'라는 쉽게 오가는 명칭이 가지는 영향력도 작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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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은 불순분자라는 사실이 탄로날 즈음에 인생스피치를 접어두고 마지막 호소를 한다. 당신들이 쓰고 있는 색안경을 벗고, 혐오를 멈춰달라고. 자신의 편에 함께 설 사람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논리 허점은 없었다. 하지만 출연진들은 논리에는 관심없었다. 형장의 이슬이 될 벤자민을 비웃으며 그간 쌓인 혐오를 배설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쓸쓸히 탈락한다. 홀로 걷던 외로운 길 끝에서 그가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 사람들은 말이 잘 안통하는구나. 산수도 못하는 문돌이들. 다 망하세요.' 혐오를 받아온 불순분자 벤자민은 안타깝게도 또 다른 혐오를 낳았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훗날 가해자가 되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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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불순분자였던 벤자민은 탈락 후 그레이를 2대 불순분자로 지정한다. 지목 이유는 간단했다. 그레이가 커뮤니티에 불러온 혼란에 대해 늦게나마 심판하기 위해서. 불순분자는 제작진이 시켜서 한 것이지만, 배신자는 본인이 선택한 행동이기때문에 벌을 받아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레이는 '출연진들이 생각하는' 불순분자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평화협정을 이어오던 잔잔한 커뮤니티에 사상검증이라는 돌을 던져 처음이자 유일한 사상검증 탈락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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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가 말하는 하마를 탈락시킨 이유를 듣다보면 순한맛 사이코패스가 떠오른다. 하마가 자신을 불순분자라고 너무 의심해서 위기감을 느껴서 사상검증을 실시했다고 한다. 실제로 공격을 받았다는 알림은 뜬 적은 없었다. 그동안 의심받던 다른 출연자들은 사상검증할 줄 몰라서 안 했던게 아니다. 하마가 탈락한 순간에도 그레이는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다. 결국 증거가 수렴하면서 그레이가 실제 가해자였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레이는 변명만 늘어놓을뿐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피해자인 하마에게도, 잠재적 가해자로 몰린 벤자민에게도, 사회를 구성하는 출연진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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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내내 그레이에 대한 대중들의 평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뒤풀이에서 따뜻한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본인의 매칭으로 인해 지니의 상금을 받게 된 점이 미안해 지니에게 크게 베풀었고, 벤자민을 비롯해 다른 출연진을 인정해주었다. 방송은 방송으로 보지 못하고 인신공격을 퍼붓는 악플 세례에도 '무플보다 낫다'는 말로 화답하며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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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든 이퀄리즘이든 그들이 바라는 미래는 같다. 성별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현재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페미니즘은 아직 차별이 잔존하고, 이퀄리즘은 차별이 해소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견해를 좁혀나가는 과정에서 논의는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논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논의가 혐오로 번지지 않는 것. 토론 주제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과 무차별적인 혐오가 뿌리내리지 않게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불순분자가 사라져도, 또 다른 불순분자를 찾는데에만 혈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