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1 <소설 프로젝트 2: 하양>

백예린 - antifreeze(원곡: 검정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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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4:10] 얼마만의 재회가 이렇게 될 줄이야. 머리를 질끈 묶고 안전벨트를 맨다. 입에선 펄펄 끓는 주전자처럼 김이 나온다. 픽업트럭을 몰아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른다. 의자는 또 왜 이리 높은지 액셀에 다리가 닿지 않는다. 작달막한 나의 높이를 찾는데 한숨이 나온다. 키는 멀대같이 큰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왜 트럭을 뽑았대. 조수석에 축 늘어진 강민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이마에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닦아 주려는데 완전히 얼어 피부에 들러붙어있다.

열일곱. 그를 처음 만난 10년 전. 시골의 작은 중학교를 졸업했던 나에게는 도심 고등학교의 생활이 너무 낯설었다. 시골에선 입지 않던 교복, 시끌벅적한 쉬는 시간, 낯선 기숙사 생활, 처음 듣는 지역 이름과 그곳에 자주 놀러 갔던 이야기를 들어놓는 친구들. 나는 지구를 도는 달처럼 학급을 겉돌기만 했다. 그런 나에게 먼저 찾아와 준 사람이 강민이었다.

"나 말고 이름 외자인 사람은 진짜 오랜만이네. 린이라 불러도 되지?"

모두들 성을 붙여 하린이라고 부르는 가운데 들려온 린 한 글자가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태양같이 따스했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고 날 찾아와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쉬는 시간만 되면 그를 기다렸다. 나를 찾아달라고 속으로 빌면서 그를 몰래몰래 바라보았다. 해는 언제나 떠올랐고 햇살 가득 담은 목력은 하얗게 피어났다.

[PM 4:15]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 키를 힘껏 돌려본다. 주저할 시간이 없다. 주인을 쏙 빼닮은 트럭은 몇 번 툭툭 거리고나서야 시동이 걸린다. 라디오에선 폭설로 인해 졸업식 행사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조심스레 액셀을 밟는다. 발목이 부어 제대로 힘을 줄 수가 없다. 눈에 파묻힌 바퀴가 헛도는 소리가 들려온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예열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발로 차듯 엑셀을 풀로 밟는다. 덜거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 빠져나온다.

스무 살이 되던 해, 1월 1일. 그를 만나 고백했다. 너를 좋아해 왔다고. 그는 건네받은 편지를 돌려주며 답했다.

"알아"

그날 밤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오래 울어볼 날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피 울었다. 나를 위로하는 기숙사 룸메이트들의 말조차 밉게 들렸다. 한 달의 길고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목련 꽃눈이 돋아날 즈음, 졸업식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친구들의 등쌀에 못내 인사를 건네려 날 찾아온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절대 울지 않기로 다짐했던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꽃다발로 그의 가슴팍을 연신 내리치며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러자 이번엔 더욱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왔다.

"고백하기도 전에 울면 어떡해. 보고 싶었어"

그렇게 우리의 죽고 못 사는 연애가 시작되었다. 고된 예열을 마친 우리는 기다려준 시간에 보답하는 모터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누가 더 사랑하는지 내기라도 하듯 더 높이 오르려 경쟁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멍청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1월 1일 주려던 편지 다시 돌려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가 물어올 때면 어찌나 얄미운지. 울먹이는 톤으로 성대모사라도 할 때면 옆구리를 세 대 쳐주었다.

[PM 4:30] 5km 정도 달렸나 싶은데 냉각수 온도가 급격히 오르더니 보닛에서 엄청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얼어있던 모터 예열을 충분히 하지 않고 풀 액셀을 밟은 탓인 것 같다. 강민이 몇 년 전 지나가는 말로 뱉었던 한 마디가 생각난다. '과열된 모터엔 냉각수가 필요하고, 얼어붙은 모터엔 부동액이 필요하다. 우리 사이도 그렇지 않을까'. 몇 번째 겪는 빙하기인데 아직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나 자신이 하찮게 느껴진다. 시야를 가리는 건 둘째치고 배관이 터지지 않았나 가장 걱정된다. 욕심 내지 않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눈길에 미끄러져 몇 미터 정도를 더 가서야 차량이 멈추어 선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우리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정확히는 이 지구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태양과 달의 일식으로 인해 며칠간 하늘에서 비만 내렸다. 그칠 듯 말 듯 하던 비가 몇 달간 이어졌다. 기상학자들은 뉴스에 나와서 지구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들만 늘어놓았다. 흘러넘친 빗물은 우리 사이도 갈라놓았다. 비가 많이 내리다 보니 우울한 날들이 늘어갔고 서로에 대해 아쉬운 점들이 쌓여갔다. 거리엔 불어난 물이 차올라 외출이 어려웠기에 만남 자체가 줄었다. 비가 그친 틈을 타 겨우 만나도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겐 함께 누워 천장을 바라볼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야기되지 못한 멍청함은 서로의 이미지 자체로 굳어져갔다.

[PM 4:35] 방한모를 고쳐 쓰고 트럭에서 내린다. 지금껏 봐온 눈보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싶다. 엔진룸 쪽에 손을 넣어보자 히터 호스 쪽으로 가는 라인의 냉기가 느껴진다. 이 날씨엔 냉각수가 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다행히 배관은 정상이었다. 냉각수가 더 얼지 않게 해 줄 부동액만 넣어주면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1년간 지겹도록 내리던 비는 스물 한살이 끝남과 동시에 그쳤다. 대신 눈이 내리더니 영화서도 볼 수 없던 눈보라가 불었다. 일기예보에선 빙하기가 도래했다며 정부의 특별 재난대책들을 앞다투어 보도하느라 바빴다. 우리 사이의 재난에는 대책이 없었다. 서로를 향한 물음은 점차 식었고 시동 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스물둘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도 없었다. 졸업식 시즌이라 길가엔 꽃다발을 판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졸업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나의 졸업식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는데. 그에게 이별 선물이라도 줄 겸 한 다발 고르려는데 선뜻 손이 나서지 않았다. 그 녀석이라면 헤어지고 나서도 평생 꽃다발을 간직할 것 같았다.

결국 빈 손으로 그를 만났다. 이별을 통보하는데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헤어짐을 생각지도 못한 듯한 반응이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티를 냈는데 부족했나 싶었다. 한참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그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창밖의 앙상한 목련 나무를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다시 봄이 오지 않을까?"

집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가 마지막이니 포옹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냉정히 선을 긋고 손을 흔들며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늦은 아침 눈을 뜨면 그의 SNS에 몰래 찾아가는 게 일상이었다. 외향적인 성격과 달리 SNS에는 별다른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길래. 몸이 바빠지면 덜 생각날 것 같아서 집 주변으로 봉사활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봉사자들과 통성명을 할 때마다 그가 생각났다.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또 있으려나. 그는 지금 누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으려나.

[PM 4:40] 푹푹 빠지는 발을 끌고 트럭 뒤편 적재함으로 향한다. 덮개 천막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그 밑을 살짝 들춘다. 서너 개의 서랍이 로프로 고정되어 있다. 적재함이 높아서인지 내 키가 작아서인지 서랍엔 손이 닿지 않는다. 타이어를 밟고 올라가 적재함 덮개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본다. 바람 소리가 줄어서인지 포근하게 느껴진다. 방한 용품이라고 적힌 커다란 서랍을 열어본다. 스노체인부터 시작해서 성에 제거기, 부동액까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정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강민의 성격이 그대로 담겨있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자취였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예고 없이 찾아왔던 첫 번째 빙하기는 1년 동안 지속되었고, 스물셋에 다시금 봄이 왔다. 사람들은 전처럼 푸르른 지구를 만드는데 한뜻을 모아, 녹은 눈 사이로 씨를 심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태양을 즐기던 중, 고등학교 룸메이트가 유학을 앞두고 연락을 해왔다. 근황 얘기를 주고받는데, 날도 풀린 겸 미뤄왔던 동창회를 추진해보자고 나를 꼬드겼다. 혹시나 자리를 불편해하지 않을까 나의 의사를 먼저 물어주는 게 너무 고마웠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무치게 그리운 정도는 아니고 약간 아릿한 정도로만 그리웠기에 쿨하게 얼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떠들썩한 그의 테이블에 자꾸만 눈이 갔다. 언변이 능숙하고 배려심이 많아 주변에 언제나 사람들이 모이던 학창 시절의 강민. 처음 만났던 교실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게다가 마지막 만남이 있던 1년 전과 달리 여유로움도 넘쳤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언제쯤 내 테이블로 올까, 나를 뭐라고 부르려나. 그러나 그는 끝내 나를 부르지 않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인사는 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기도 하면서 그토록 따뜻하던 사람을 차갑게 내쳤던 내 자신이 악하게 느껴졌다.

평소엔 잘 가지 않는 2차, 3차까지 가면서 술을 들이켰다. 어지러운 속을 달래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술집 거리의 활기가 느껴졌다. 몇 달 만에 되찾은 사계절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사람 구경을 하는데 저 멀리 그가 보였다. 몇 시간 전에 나갔던 녀석이 왜 아직 이 거리에 있나 싶을 때 갑자기 그가 환히 웃었다. 집에 돌아와 귀여운 강아지를 내려다보는 듯한 웃음.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한껏 취한 여자가 그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안으로 숨었다. 왜 숨었는지는 모르겠다. 둘이 껴안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였을까.

[PM 4:45] 서랍에서 부동액을 꺼내어 점퍼 주머니에 넣는다. 찾는 김에 부은 발목을 가라앉힐 스프레이가 있나 다른 서랍도 살펴본다. 하지만 강민이 그렇게 좋아하던 라면과 과자만 가득하다. 설원 한복판이지만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겠다는 웃픈 생각을 하며 도로 넣어놓는데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 린. 내 이름이 적혀있다. 무얼 숨겨놓았길래 이리도 꽁꽁 감춰두었는지 궁금하다. 상자 뚜껑을 열자, 새하얀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알록달록함이 담겨있다. 그간 내가 강민에게 썼던 편지들이다. 헤어지고 나서 편지를 모두 버렸다며 큰소리치던 그가 떠오른다. 날짜를 차례차례 살펴보니 단 한 장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바보 같은 놈.

  다신 오지 않을 것 같던 빙하기는 스물넷에 한번 더 찾아왔다. 두 번째 겪는 빙하기라 그런지 사람들은 보다 능숙하게 대처했다. 기상학자들이 예상한 날짜와 딱 맞아떨어졌기에 제설작업은 물론, 동절기 상품들도 미리 구비되어 있었다. 예고 없이 소실된 색채에 아쉬움만 내비쳤던 지난 빙하기와 달리, 각기 다른 방법으로 집에 색채를 들여놓았다. 거리의 하얀 색감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빙하기가 끝나자 세 번째 빙하기가 언제 돌아올지 기다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PM 5:00] 덮개 천막에서 빠져나오니 눈보라가 조금 잦아든 것이 느껴진다. 온 세상이 온통 하얗다. 얼마나 높이 올라온 건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온 세상이 하얗다. 막막하기만 하다. 출발할 때엔 해가 중천에 떠있었는데 어느덧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산 중턱인 것을 고려하면 어둠이 내리기까지 2시간 정도 남은 것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다. 이 정도 노력했으면 하늘도 돕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뜨겁게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간절히 빌며 부동액을 천천히 들이붓는다. 예감이 좋다. 차에 다시 올라타 안전벨트를 밴다. 강민의 입에서 나오는 김은 처음 뉘었을 때에 비해 그 양이 확연히 줄어있다. 다시 마음이 급해진다.

여느 때처럼 멍청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스무 살의 강민은 문득 책 한 권을 소개해주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룸메이트들과 몇 번이고 돌려본 책이었기에 내용은 물론 대사까지 빠싹 하게 외웠던 나였지만 처음 듣는 척해주었다. 그는 내쪽으로 몸을 돌려 한동안 책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듣다 보니 왜 책 얘기를 꺼냈는지 감이 왔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사뭇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우리도 10년 뒤에 다시 만날 장소를 미리 정해두면 어떨까"

나는 그 약속의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멍청한 답변으로 받아쳤다.

"10년 뒤에도 함께 있을 거 아니었어? 너 나 버릴 생각이었지"

[작일 PM 4:00] 스물일곱, 어제. 이제 막 꽃눈이 트는 2월 말. 나는 문득 홀로 바다를 보고 싶어 졌다는 변명을 하고 연차를 냈다. 예약해둔 호텔 주소를 입력하고 먼 길을 나섰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다. 과연 그가 올까. 오면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한참을 달리고서 도착하니 해가 떨어져 있었다. 어둑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체크인을 했다.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너머로 밤바다가 펼쳐졌다. 조명이라곤 가로등뿐인 바닷길엔 모래사장을 걷는 연인 한 둘이 전부였다.

[작일 PM 9:00] 방에 짐을 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일 아침 일찍 약속 장소로 나가야 하기에 미리서부터 알람을 맞춰 두었다. 샤워를 하는 데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도 이 호텔에 있지 않을까. 한적한 바닷가에 근방의 호텔이라곤 이곳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약속시간에 늦는 것을 가장 큰 실례라고 여겨왔던 강민이기에 분명 이 호텔을 잡았을 것 같았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직원에게 강민이라는 사람으로 예약된 방이 있는지 물었으나, 개인정보와 관련된 사항이라 신분증 없이는 조회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노트북을 열고 호텔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당시 쓰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보았다. 역시나 풀릴 리가 없었다.

[작일 PM 11:00] 불안한 마음 달랠 겸 아까 봐 두었던 모래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어디부터가 바다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다. 모래 위에 그대로 앉아 찰랑거리는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SNS를 찾아가 메시지를 보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오기는커녕, 그런 약속이 있었는지도 기억 못 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대로 집에 돌아갈까도 싶었다.

[AM 00:00] 오랜만에 장거리를 운전해서 그런지 피곤했다. 방에 돌아가서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어서는 데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달빛도 내리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강민 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양손에 커피를 들고 발이 모래에 푹푹 빠지는데도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우습게 보이면서도 너무 안심이 되었다. 커피 위에는 살얼음이 떠있었다. 낯익은 바다는 거울처럼 우릴 비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짐했다.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라고. 바닷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얼어붙은 모래 위에서 춤을 추며 그동안 우리를 갈라놓았던 절망과 싸웠다.

[AM 1:00] 호텔로 돌아와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엔 약속 장소로 가지 않고 그대로 늦잠을 잤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 멍청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강민은 더 멍청해져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중 으뜸은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옆구리를 쥐어박았겠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덩달아 멍청해지고 싶었다. 산에 오르기엔 조금 늦은 시각이었기에 급하게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갔다. 둔탁한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리는 하얀 픽업트럭 앞에 섰다. 그는 내 짐을 적재함에 싣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낡아빠진 매너는 어떤 여자한테 배워 온 거냐며 놀려주고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PM 1:00] 그렇게 따뜻했던 오늘의 우리에게 예고 없이 세 번째 빙하기가 찾아왔다. 라디오에선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기상학자들이 갑작스레 찾아든 대재앙에 연거푸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이 두절되어 지지직 거리더니 정적이 흘렀다. 따뜻했던 차 안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산 중턱에 도달했던지라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좁아졌다. 그는 스노 체인을 걸어야겠다며 차를 멈춰 세웠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지 몇 초쯤 지났을까, 그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으로 넘어가는데 하얀 눈 위로 빨갛게 진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자국을 따라 시선이 향한 곳엔 목련 나무 옆으로 5미터를 굴러 떨어진 강민이 보였다.

[PM 3:00] 휴대전화는 먹통이 된 지 오래였다. 전원조차 켜지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강한 눈보라는 메아리조차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미끄러졌던 그 길을 따라 나도 똑같이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장갑이 조금 찢기고, 착지하면서 발목을 삐긴 했지만 그에게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딪힌 듯 한 돌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놀랄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를 등에 메치고 일어나 보지만 나보다 21cm나 큰 그를 업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는 수 없이 그의 한쪽 팔을 내 목에 감아 그를 일으켜 세워 보았다. 한결 나았다. 하지만 5m를 걸어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온통 하얀 세상에서 어디가 높고 낮은지 구분조차 쉽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나도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면 옆으로 빙 돌아가는 방법이 유일했다. 실행에 옮겼다.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바람에 날리는 눈이 내 얼굴을 때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트럭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과연 돌아 올라갈 길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걸었다.

[PM 3:30] 30분쯤 걸었을까. 올라갈만한 높이를 발견했다. 그를 먼저 밀어 올리고 나도 따라 올라갔다. 이제 걸어온 만큼 트럭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막막했다. 그를 다시 한번 부축하는데 어제 그가 했던 멍청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 어떡해. 그때도 지난번처럼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까 걱정돼. 그런데도 난 좋아. 생각해봐.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이 어딨겠어.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랑을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 같아. 다른 여자 아니고 네 얘기니까 표정 좀 풀고 들어줘"

숨이 막힐 것 같이 차가웠던 공기 속에 그의 체온이 내게 스며들었다.